살인자의 기억법
원작 소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老) 연쇄살인범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범죄 심리 소설이다. 주인공 병수는 한때 악명 높은 살인자였지만, 지금은 노쇠한 몸과 병든 기억력 때문에 평범한 노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는 과거에는 ‘악’으로 규정되는 이들을 제거한다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며, 경찰에 한 번도 잡히지 않은 완전범죄자였다. 그러나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서 그는 과거의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고,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는 삶을 살게 된다.
병수의 삶에서 중심적인 존재는 그의 딸 은희이다. 그는 은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지만, 기억의 혼란 속에서 때때로 은희와 아내의 모습조차 혼동한다. 어느 날 그는 은희가 교제하는 남자 태주를 만나게 되고, 태주에게서 자신과 같은 살인자의 기운을 직감한다. 그는 태주가 은희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다시 살인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기억이 자꾸 왜곡되고 중첩되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병수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따라가며, 독자에게도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그의 착각인지 불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살인 장면을 떠올리며 현재 사건과 뒤섞어 혼란스러운 진술을 이어가고, 독자조차 진실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소설의 결말에서는 병수가 끝내 딸을 지키기 위해 태주를 제거했는지, 아니면 망상 속에서 허공에 칼질을 했는지 모호하게 처리된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범죄 소설처럼 사건의 진실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파괴되는 과정, 진실과 망상이 구분되지 않는 내면의 혼돈을 통해 독자에게 ‘기억과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경험하게 한다. 결국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쇠와 기억 상실, 죄와 속죄라는 인간적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영화 내용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은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스릴러적 긴장감과 극적 전개를 강조했다. 영화의 주인공 역시 과거 연쇄살인범이었던 노인 **병수(설경구)**이다. 그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이 빠르게 퇴화하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제는 수의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딸 **은희(설현)**가 있다.
어느 날 병수는 우연히 은희의 연인인 **태주(김남길)**와 마주친다. 태주는 매력적이고 겉으로는 친절해 보이지만, 병수는 그 안에 숨겨진 살인자의 본능을 즉각 알아챈다. 그는 태주가 자신과 같은 살인범일 뿐 아니라 은희를 위협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병수의 알츠하이머는 그의 판단에 심각한 장애를 준다. 그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과거 살인 장면을 현재의 상황과 혼동하며 점점 불안정해진다.
영화는 원작보다 스릴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태주를 명확한 살인자로 설정한다. 병수는 기억의 혼란 속에서도 은희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태주와 치열한 두뇌 싸움과 육체적 대립을 벌인다. 그의 살인 본능은 이미 사라졌지만, ‘부성애’라는 또 다른 본능이 그를 다시 싸움으로 끌어들인다.
영화의 전개는 소설보다 훨씬 직선적이고 명확하다. 병수는 끝내 태주와의 결투 끝에 은희를 지켜내고, 자신은 점점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딸을 향한 사랑만은 붙잡는다. 엔딩은 비극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마무리되며, 관객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부성애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차이점
소설과 영화는 같은 뼈대를 공유하지만, 주제와 전개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소설은 무엇보다 진실의 모호성을 핵심으로 한다. 주인공 병수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이 점점 붕괴되어 가는 노인 살인자이며, 독자는 그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병수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거나 망상에 빠지는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독자는 태주가 진짜 살인자인지, 은희가 정말 위기에 처한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즉, 소설은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과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말 역시 열려 있어, 병수가 과연 딸을 지켜낸 것인지, 아니면 망상 속에서 허공을 향해 몸부림친 것인지 끝내 알 수 없게 처리된다. 이는 김영하 특유의 문학적 실험으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 기억과 존재를 탐구하는 작품의 색채를 짙게 한다.
반면 영화는 이러한 모호성을 줄이고 명확성과 감정적 울림을 선택했다. 태주는 단순한 의심스러운 인물이 아니라 실제 살인자로 설정되며, 병수는 기억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딸 은희를 지키려는 아버지로 그려진다. 따라서 관객은 병수의 혼란에 끝없이 휘말리기보다, ‘부성애를 가진 노인 대 냉혹한 살인자’라는 구도를 명확히 인식하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의 결말은 소설처럼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다. 병수는 결국 태주와 맞서 싸워 은희를 지켜내며, 자신의 기억은 사라져도 부성애만은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이처럼 소설은 철저히 문학적 실험과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고, 영화는 대중적 스릴러와 가족애의 드라마로 각색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같은 뼈대를 가지고도, 소설은 독자에게 혼돈과 질문을 던지고, 영화는 관객에게 긴장감과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차이가 있다.